대한항공 타고 제주에 내려 용담동만 걸어봤더니

얼마 전 대한항공을 타고 제주에 내렸는데, 공항 밖에서 택시를 잡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다를 보러 멀리 갈 필요가 있을까. 이번에는 숙소에 짐을 풀기 전, 공항과 가까운 용담동 골목부터 걸어보기로 했다.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동네로 들어갔다
제주에 오면 늘 첫날부터 마음이 바빠졌다. 렌터카를 찾고, 유명한 풍경을 향해 달리고, 문 닫기 전에 밥집에 도착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날은 오후 일정 하나를 비워두었다. 덕분에 공항에서 나온 뒤에도 시계를 자꾸 확인하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려 처음 걸은 곳은 큰길에서 한 블록 들어간 주택가였다. 낮은 담장 너머로 빨래가 보이고, 문 앞에 화분을 놓은 집들이 이어졌다.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장면이라기보다 누군가의 평일에 잠깐 들어온 기분이었다. 골목 안에서는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대한항공을 타고 왔다는 말이 조금 거창하게 느껴질 만큼, 도착해서 한 일은 소박했다. 편의점에서 물 한 병을 사고, 그늘이 있는 길을 골라 걸었다. 비행기에 있던 시간보다 이 동네에서 천천히 보낸 시간이 더 길어졌다는 게 좋았다.
바다보다 오래 기억에 남은 골목
용담동에서는 골목을 걷다가 바다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쉬웠다. 내가 걸은 날에도 길 끝에서 수평선이 보여 자연스럽게 해안 쪽으로 나갔다. 차가 지나는 소리와 파도 소리가 함께 들렸고,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갈 때는 잠깐 말을 멈추게 됐다.
바닷가에 서 있으니 사진을 찍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한적한 동네 여행을 기대했다면 해안도로 전체를 조용한 산책길로 생각하지는 않는 편이 좋겠다. 내가 편안했던 곳은 오히려 바다에서 한두 블록 물러난 안쪽 길이었다. 차가 지나가면 잠시 벽 쪽으로 붙어야 할 만큼 좁은 구간도 있었지만, 그 느린 속도가 싫지 않았다.
걷다 보니 오래된 주택과 새로 손본 건물이 나란히 있었다. 어떤 집 앞에서는 저녁 준비하는 냄새가 났고, 다른 골목에서는 마당을 쓸던 소리가 들렸다. 유명한 전망대처럼 한눈에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은 없었다. 대신 몇 걸음마다 생활의 표정이 달라졌다.
나는 골목에서 약 30분을 보내고 바다 쪽에서 15분쯤 쉬었다. 특별한 장소를 찾아 찍어둔 시간은 아니다. 그날 내 발걸음이 그랬다는 뜻이다. 해안에서만 오래 머물렀다면 용담동을 그저 공항 가까운 바닷가로 기억했을 것 같다.
걸어보니 알게 된 작은 요령
이 동네는 목적지를 여러 개 찍어두고 이동하는 방식보다, 큰길 하나를 기준으로 천천히 오가는 편이 내게 맞았다. 바다 쪽에서 안쪽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낯선 갈림길이 나오면 다시 큰길로 돌아왔다. 길을 잃을 걱정 없이 돌아다니니 주변을 볼 여유가 생겼다.
다만 생활하는 분들이 있는 동네다. 집 안을 향해 카메라를 들거나 대문 앞에 오래 서 있는 일은 피했다. 예쁜 담장이 보이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눈으로만 보고 지나갔다. 조용한 장소를 좋아한다는 마음과 그곳의 조용함을 지키는 행동은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걷는 동안 인도 폭이 좁은 구간도 있었다. 나는 차가 보이면 사진을 찍던 손을 내리고 먼저 길을 비켰다. 해 질 무렵에는 골목의 빛이 부드러워 좋았지만, 처음 온 길을 어두워진 뒤까지 걷고 싶지는 않았다. 낯선 동네에서는 돌아갈 방향을 알 수 있을 때가 가장 마음 편하다.
밥집이나 카페는 미리 정하지 않았다. 막상 그 자리에 서면 영업 여부나 사람이 몰린 정도가 생각과 다를 수 있어서다. 이번 산책에서는 물 한 병이면 충분했다. 한 끼를 꼭 해결해야 한다는 계획이 없으니 마음에 드는 길 앞에서 멈추는 일도 쉬웠다.
제주에서 첫날을 천천히 쓰는 방법
공항 근처라는 말 때문에 용담동을 지나가는 길로만 생각했었다. 실제로 걸어보니 짧은 시간에도 골목과 바다 사이의 분위기가 꽤 달랐다. 비행기에서 내려 바로 먼 곳으로 이동할 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다.
물론 이날 내가 조용히 걸었다고 해서 언제나 사람이 적다는 뜻은 아니다. 날씨와 시간에 따라 바닷가의 분위기는 달라질 테고, 골목도 주민들의 생활이 먼저인 공간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용담동의 유명한 지점보다, 그 주변에서 무리 없이 걷다 돌아오는 한 시간이 더 잘 맞을 수 있다.
대한항공을 타고 제주까지 온 날, 오래 남은 장면은 창밖의 구름도 큰 풍경도 아니었다. 골목을 빠져나오다 뒤돌아봤을 때, 담장 옆 화분에 저녁빛이 닿아 있던 순간이었다. 다음에 제주에 가도 첫날만큼은 멀리 달리기 전에 가까운 동네를 한번 걸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