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여행에서 묵호 골목을 천천히 걸어봤더니

얼마 전 동해 여행에서 묵호역에 내렸을 때, 바다로 곧장 가지 않고 역 앞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낮은 건물 사이로 빨래가 걸려 있고, 문 열린 가게 안에서는 점심을 준비하는 소리가 났다. 바다를 보러 온 여행인데 이런 장면 앞에서 먼저 걸음이 느려졌다. 묵호는 전망 좋은 곳을 찾아 바쁘게 움직일 때보다, 사람들이 사는 길을 따라 걸을 때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묵호역 앞에서 바다를 조금 늦게 만났다
묵호역에서 나와 발한동 쪽 골목으로 방향을 잡았다. 큰길에는 차가 오가지만 한 블록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오래된 간판과 작은 식당, 손님을 기다리는 의자가 차례로 보인다. 관광지에서 흔히 보는 말끔한 거리와는 다르다. 그래서 좋았다. 이 동네에서는 뭘 찍어야 할지 찾기보다 어디에서 사람들이 하루를 보내는지 보게 된다.
골목은 일부러 복잡하게 돌지 않았다. 역 주변을 천천히 걷다가 항구 쪽으로 내려가면 길을 잃을 걱정도 적다. 묵호항 가까이 가면 바람에 바다 냄새가 섞이기 시작한다. 작업하는 사람들과 물건을 사러 온 사람이 함께 지나가니, 항구를 조용한 산책길처럼 생각하고 온다면 조금 낯설 수도 있다. 근데 그 움직임이 묵호의 일상이다. 차가 지나는 구간에서는 길가에 오래 서 있지 않고, 걸음을 멈출 땐 보행 공간이 넉넉한 곳을 골랐다.
점심도 유명한 메뉴를 정해 두지 않았다. 문이 열린 동네 식당에 들어가 한 끼 먹고 다시 걸었다. 식당마다 영업일과 준비한 음식이 다르니 한 집만 목표로 삼지 않는 편이 마음 편하다. 골목에서 보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바다 앞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왔다면 몰랐을 묵호의 속도를 조금은 느낀 것 같았다.
논골담길에서는 벽화보다 집 앞의 풍경을 봤다
묵호항 쪽에서 논골담길로 올라가면 길이 금세 가팔라진다. 동해시 관광 안내에도 이 골목은 등대오름길과 논골1·2·3길, 네 갈래로 소개돼 있다. 어느 길을 택해도 묵호등대 쪽으로 이어지지만, 계단과 비탈이 많아 편한 신발이 잘 어울린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중간중간 뒤를 돌아봤다. 지붕 사이로 조금씩 넓어지는 항구가 눈에 들어왔다.
논골담길은 이미 알려진 곳이라 한낮에는 사진 찍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사람 적은 길을 기대한다면 벽화 앞에서 오래 머물기보다 골목의 흐름을 따라 천천히 걷는 편이 좋다. 인기 있는 그림에서 몇 걸음만 벗어나도 집 앞 화분이나 닳은 계단처럼 작은 장면이 보인다. 다만 이곳은 누군가의 집 앞이다. 열린 문 안을 들여다보거나 주민의 생활 공간을 배경 삼아 오래 촬영하지 않으려 했다.
등대에 닿았을 때도 전망을 오래 붙잡지는 않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시원하지만, 내게 더 선명했던 건 올라오는 동안 들었던 발소리와 골목 사이의 바람이었다. 내려올 때는 올라간 길과 다른 골목을 택했다. 비슷해 보이는 계단에서도 항구가 보이는 각도가 조금씩 달라져, 같은 동네를 한 번 더 걷는 기분이 들었다.
어달 쪽으로 가니 바다가 일상에 가까워졌다
묵호에서 북쪽 어달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묵호의 골목과 항구를 본 뒤라 그런지, 해변 가까운 동네의 낮은 건물들이 더 차분하게 보였다. 바다는 여기서도 크고 파랗지만, 주변을 걸으며 눈에 남는 건 파도만이 아니다. 가게 앞에 놓인 물건, 길을 건너는 주민, 바람이 세질 때 잠깐 발걸음을 멈추는 사람들까지 함께 보인다.
어달해변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다. 날씨 좋은 주말이나 여름에는 한적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내가 걸었던 날처럼 비교적 조용한 시간을 만나려면 여행 일정에 여백을 두는 게 낫다. 한 곳에 도착하자마자 다음 장소로 움직이지 않고, 해변을 조금 걷다가 바람이 덜 부는 곳에서 쉬었다. 동해의 바다는 잠깐 보고 떠날 때와 한동안 곁에 있을 때 느낌이 다르다.
묵호역과 어달 사이를 한 번에 전부 걸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논골담길의 경사를 오른 뒤라면 생각보다 다리가 무겁다. 이동 구간은 그날 체력과 날씨에 맞춰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고, 마음에 드는 동네에서만 걷는 편이 오히려 여유로웠다. 해안 가까운 길에서는 차량과 바람을 함께 살피는 게 좋다.
많이 보는 대신 오래 머문 하루
이날 동선은 묵호역 앞 발한동 골목에서 시작해 묵호항과 논골담길을 걷고, 어달 쪽에서 바다를 보는 순서였다. 장소를 여럿 넣지 않으니 길을 찾느라 휴대전화를 보는 시간도 줄었다. 논골담길 오르막에서는 예상보다 자주 쉬었고, 항구에서는 작업하는 길을 피해 돌아가기도 했다. 계획대로만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였다.
동해 여행이라고 하면 넓은 해변과 이름난 전망대를 먼저 떠올리기 쉽다. 내게는 묵호역 앞에서 바다를 조금 늦게 만난 시간이 더 진하게 남았다. 다음에 다시 간다면 새로운 명소를 찾기보다, 그 골목의 다른 시간대를 걸어보고 싶다. 같은 길도 아침의 가게 문이 열릴 때와 저녁의 불이 켜질 때는 분명 다르게 보일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