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단풍 명소를 걷다가 동네 길에 오래 머물렀다

얼마 전 제천에서 단풍을 보러 나섰다가 의림지보다 그곳으로 이어지는 길에 더 오래 머물렀다. 물가의 붉은 나무도 좋았지만, 산책 나온 주민이 지나가고 밭 너머로 낮은 산이 보이는 풍경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제천 단풍 명소를 찾는다면 이름난 전망대만 찍고 돌아오기에는 아깝다. 조금 느리게 걸을 수 있는 길도 있다.
의림지로 가는 길부터 천천히
시내에서 걷기 시작한다면 삼한의 초록길이 편하다. 제천시 문화관광 안내에 따르면 이 길은 약 2km로, 의림지뜰을 따라 이어진다. 길이 넓고 경사가 심하지 않아 목적지를 향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가을에는 길가 나무의 색과 수확철 들판의 색이 따로 눈에 들어온다.
나는 의림지에 닿기 전, 들판이 잘 보이는 자리에서 한 번 걸음을 멈추는 편이다. 호수 앞에서는 풍경을 보러 온 사람들의 발걸음에 속도를 맞추게 되는데, 이 길에서는 동네 산책의 속도가 자연스럽다. 한 방향으로 쭉 걷다가 피곤하면 돌아서도 괜찮다. 끝까지 걸어야 비로소 좋은 길은 아니다.
의림지에 도착하면 물가를 따라 잠시 걷고, 사람이 몰린 자리에서는 조금만 더 안쪽으로 움직여 본다. 물에 비친 단풍과 오래된 나무를 보는 재미가 있다. 다만 의림지는 제천을 대표하는 곳이라 가을 주말에는 조용한 산책을 기대하기 어렵다. 사람 적은 시간을 원한다면 평일 오전이 낫고, 그날 여건이 맞지 않으면 초록길에 시간을 더 쓰는 것도 좋다.
의림지 뒤편 솔밭공원에서는 색이 느려진다
의림지에서 발길을 조금 더 이어가면 솔밭공원 쪽으로 갈 수 있다. 제천시가 안내하는 산책 동선도 의림지에서 솔밭공원으로 이어진다. 호수 주변의 단풍이 눈에 확 들어오는 장면이라면, 이곳은 소나무의 짙은 초록 사이로 가을빛을 조금씩 보는 길이다.
솔직히 화려한 단풍 사진 한 장만 생각하면 심심할 수도 있다. 대신 바닥의 낙엽을 밟으며 걷거나 벤치에 앉아 쉬기에는 마음이 편하다. 공원은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찾는 공간이어서 관광지 한가운데에 있다는 느낌도 옅다. 의림지에서 사진을 찍고 곧장 차로 돌아가기보다, 여기까지 걸어와 잠깐 앉아 있는 시간이 나는 좋았다.
솔밭공원 너머에는 비룡담 저수지로 이어지는 길도 있다. 하지만 뒤쪽 숲길까지 욕심내면 산책이 제법 길어진다. 해가 짧아지는 계절에는 돌아갈 시간과 체력을 먼저 생각하는 편이 좋다. 가벼운 신발로 나왔다면 솔밭공원에서 발길을 돌려도 충분하다.
상천리에서는 마을을 지나 산자락으로
호수 쪽으로 움직일 날에는 청풍호 자드락길 5코스의 출발지인 상천리를 떠올린다. 제천시 안내에는 상천리에서 마을회관과 여러 쉼터를 지나 옥순봉쉼터로 이어지는 길로 소개돼 있다. 이름난 봉우리만 바라보며 걷기보다 마을을 통과하는 앞부분에 시간을 쓰면, 제천의 가을이 조금 더 생활 가까이 다가온다.
이 길에서는 집 앞과 농로가 먼저 나오고, 조금씩 산길의 기운이 짙어진다. 그래서 출발할 때부터 목소리를 낮추게 된다. 집이나 밭 가까이에서는 사진을 찍기 전 한 번 더 살피고, 사유지처럼 보이는 곳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누군가 사는 동네를 걷는 일이니 풍경보다 그곳의 일상이 먼저다.
코스 전체를 걸을 계획이라면 산책보다 트레킹에 가깝게 준비해야 한다. 나는 짧게 걷고 싶을 때 마을에서 길의 분위기를 본 뒤 무리하지 않고 돌아온다. 초록길과 달리 주변에 편의시설을 쉽게 만날 거라고 기대하기 어려우니 물과 간단한 간식은 챙기는 편이 낫다. 길 상태와 이동편은 출발 전에 제천시 문화관광 안내로 다시 확인하면 마음이 놓인다.
붉은 풍경보다 오래 남은 것
제천의 가을은 장소마다 속도가 달랐다. 삼한의 초록길에서는 들판과 함께 걷고, 솔밭공원에서는 잠깐 앉아 쉬고, 상천리에서는 마을의 하루를 방해하지 않으려 발걸음을 늦추게 된다. 단풍이 가장 짙은 날을 맞히지 못해도 이런 차이는 남는다.
물론 어느 길도 늘 한적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단풍 시기와 방문 시간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래도 내게 제천에서 좋았던 순간은 사람이 없는 장면을 찾아낸 때보다, 지나가는 사람과 풍경 사이에서 내 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진 때였다. 다음에 가도 나는 의림지로 바로 향하기보다 그 앞의 길부터 다시 걸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