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여행, 방콕 골목만 걸어봤더니 관광지보다 오래 남았다

얼마 전 태국여행을 다녀오면서, 저는 이상하게도 왕궁보다 동네 빨래가 걸린 골목 앞에서 더 오래 멈춰 섰습니다. 유명한 사원과 야시장도 분명 좋았지만, 아침 9시에 문을 여는 작은 국수집, 느릿하게 강을 건너는 배, 오래된 가게의 선풍기 소리 같은 것들이 여행 뒤에도 자꾸 생각났습니다.
방콕은 관광객이 워낙 많은 도시라 어디를 가도 붐빌 것 같지만, 몇 정거장만 비켜서면 분위기가 확 달라집니다. 저는 이번 태국여행에서 일부러 큰 쇼핑몰과 인증샷 명소를 줄이고, 현지 사람들이 장 보고 밥 먹고 산책하는 동네를 따라 걸었습니다. 하루 이동비는 지하철과 배, 택시를 섞어도 대략 200~350밧 안쪽으로 맞출 수 있었고, 식사는 길거리 국수나 덮밥 기준 50~90밧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관광지 옆에서 살짝 비켜난 쿠디친 골목
첫날은 짜오프라야강 건너편의 쿠디친으로 갔습니다. 강 건너편이라 이동이 조금 번거로울 줄 알았는데, 지하철 산암차이역에서 내려 선착장까지 걷고 작은 배를 타니 오히려 여행 기분이 천천히 올라왔습니다. 배는 몇 분이면 건넙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이 방콕의 속도를 바꿔 놓습니다.
쿠디친은 포르투갈계 공동체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오래된 강변 동네입니다. 태국관광청에서도 200년 넘은 생활 문화가 이어지는 지역으로 소개할 만큼, 종교와 음식, 오래된 집들이 한 골목 안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습니다. 유명한 사원 앞처럼 줄을 서야 하는 분위기는 아니고, 주민들이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지나가는 아주 생활적인 길이 많았습니다.
저는 골목 안에서 카놈 파랑 쿠디친이라는 작은 케이크를 사 먹었습니다. 겉은 살짝 마르고 속은 부드러운 편인데, 요즘 디저트처럼 화려하진 않습니다. 근데 이상하게 손에 종이봉투를 들고 걷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달콤한 냄새가 강바람하고 섞이니, 낯선 도시인데도 오래된 동네를 빌려 걷는 느낌이 났습니다.
딸랏플루에서 밥 한 끼로 보낸 오후
둘째 날은 딸랏플루로 갔습니다. 방콕 중심부에서 크게 멀지 않지만, 시내의 반짝이는 쇼핑몰과는 결이 다릅니다. 오래된 식당, 작은 과일가게, 철길 주변의 낮은 건물들이 남아 있어서 걷는 속도가 자연스럽게 느려집니다. 최근에는 영화 촬영지로도 알려졌지만, 평일 낮에는 여전히 동네의 표정이 더 먼저 보였습니다.
여기서는 굳이 식당을 하나만 찍고 가기보다 조금씩 먹는 편이 좋았습니다. 부추 딤섬처럼 생긴 꾸어이차이, 진한 국물의 국수, 길가에서 파는 밀크티까지 이어 먹으면 한 끼가 아니라 작은 산책 코스가 됩니다. 가격도 중심가 카페 한 잔보다 가볍습니다. 저는 두 사람이 간단히 나눠 먹고 음료까지 마셨는데 200밧이 조금 넘었습니다.
딸랏플루의 좋은 점은 사진을 많이 찍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었습니다. 사실 여행하다 보면 자꾸 남길 장면을 찾게 되는데, 이 동네에서는 그냥 앉아서 사람들이 음식을 포장해 가는 모습을 보는 시간이 더 편했습니다. 태국여행에서 쉬는 날을 만들고 싶다면, 이런 동네가 훨씬 오래 숨을 고르게 해줍니다.
방끄라차오, 방콕 바로 옆의 조용한 초록
방콕에서 완전히 빠져나가긴 아쉽고, 그렇다고 하루 종일 차 소리 속에 있고 싶지 않은 날에는 방끄라차오가 괜찮았습니다. 짜오프라야강이 크게 휘어 감는 지역이라 흔히 방콕의 초록 허파라고 불립니다. 주말 시장이 열리는 시간에는 사람이 몰리지만, 평일 오전이나 이른 오후에는 꽤 한적했습니다.
저는 선착장에서 자전거를 빌려 좁은 길을 따라 천천히 돌았습니다. 길 양옆으로 나무가 가까워지고, 중간중간 작은 집과 카페, 사원이 나타납니다. 방콕 한복판에서 택시로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 공기의 밀도가 달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다만 길이 좁고 오토바이가 지나가니, 자전거가 익숙하지 않다면 욕심내서 멀리 가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 혼자라면 오전 9시 전후에 들어가 사람이 적은 길부터 걷기
- 주말 시장은 활기가 있지만 조용한 여행과는 조금 다를 수 있음
- 비 온 뒤에는 길이 미끄러운 편이라 샌들보다 운동화가 편함
- 현금이 아직 편한 가게가 있어 20밧, 50밧짜리를 챙기면 좋음
사람 적은 태국여행을 위해 내가 지킨 것들
태국여행을 조용하게 보내고 싶다면 장소보다 시간이 먼저였습니다. 같은 골목도 오전 8시와 오후 2시는 완전히 다릅니다. 현지 식당은 점심시간 직전이 덜 붐볐고, 강변 동네는 해가 너무 높아지기 전에 걷는 게 훨씬 좋았습니다. 방콕의 더위는 생각보다 빨리 체력을 가져가서, 하루에 동네 두 곳 이상을 욕심내면 분위기를 느끼기 전에 지치기 쉽습니다.
또 하나는 이동 동선을 짧게 잡는 일입니다. 지하철 한 번, 배 한 번, 도보 20분 정도면 충분한 하루가 됩니다. 유명 관광지를 모두 빼자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왕궁이나 왓아룬을 본 뒤 바로 쇼핑몰로 가지 않고, 강 건너 작은 동네에서 국수 한 그릇 먹는 식으로 사이를 비워두면 여행이 훨씬 덜 빡빡해집니다.
제가 다시 간다면 이렇게 걸을 것 같습니다
오전에는 쿠디친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걷고, 점심은 딸랏플루에서 오래된 식당을 골라 먹겠습니다. 다음 날은 방끄라차오를 반나절만 잡아 자전거를 타고, 오후에는 숙소 근처 카페에서 아무 일정 없이 쉬고 싶습니다. 태국은 자극적인 장면이 많은 나라지만, 조금만 느리게 움직이면 의외로 조용한 얼굴을 보여줍니다.
제게 이번 태국여행은 많이 본 여행이 아니라, 오래 앉아 있었던 여행에 가까웠습니다. 골목 끝 의자에 앉아 얼음 든 차를 마시고, 낡은 선풍기 바람을 맞고, 말이 통하지 않는 가게에서 손짓으로 밥을 시키는 시간. 그런 장면들이 유명한 전망보다 더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다음에 방콕에 간다면 또 큰길보다 옆길을 먼저 고를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