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봤더니, 여행은 조용한 골목에서 더 오래 남았다

버스 대신 걸어서 들어간 성북동
얼마 전 성북동에 다녀왔는데, 이상하게도 그날 기억에 남은 건 유명한 찻집도, 이름난 미술관도 아니었다. 한성대입구역에서 성북로를 따라 천천히 올라가던 길, 낮은 담장 너머로 빨래가 흔들리고 오래된 대문 옆에 작은 화분들이 줄지어 있던 장면이 더 오래 남았다. 여행이라는 말이 꼭 큰 짐과 먼 이동을 뜻하지 않는다면, 이런 동네 산책도 충분히 여행에 가깝다.
성북동은 서울 안에서도 조금 다른 속도를 가진 동네다. 큰길에는 차가 제법 다니지만, 한 골목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발소리가 또렷하게 들릴 만큼 조용해진다. 주말 오후에도 북적이는 구간은 정해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사람 적은 길이 꽤 많다. 나는 보통 목적지를 하나만 정하고, 나머지는 골목의 방향에 맡기는 편이다. 그날도 심우장 쪽으로 올라가다 북정마을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한성대입구역에서 북정마을까지, 속도를 낮추는 길
출발은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가 편했다. 역에서 나와 성북로를 따라 걷다 보면 처음 10분 정도는 생활권의 느낌이 강하다. 빵집, 작은 식당, 동네 병원, 오래된 간판이 이어진다. 관광지 특유의 들뜬 공기보다 주민들이 평소처럼 오가는 분위기라 마음이 금방 가라앉는다.
걷는 시간만 따지면 북정마을 입구까지 25분 안팎이었다. 다만 언덕이 조금씩 이어져서 빠르게 걷기보다는 중간중간 멈추는 쪽이 낫다. 성북동은 거리 자체가 길게 펼쳐지는 동네라기보다, 높낮이와 방향이 계속 바뀌는 동네에 가깝다. 그래서 지도 앱만 보고 이동하면 놓치는 장면이 많다. 담장 위로 보이는 기와, 계단 끝에 놓인 의자, 골목 모퉁이의 작은 슈퍼 같은 것들 말이다.
- 걷기 좋은 시간은 오전 10시 전후나 늦은 오후였다.
- 편한 신발은 거의 필수다. 생각보다 경사가 있다.
- 카페를 목표로 잡기보다, 쉬어갈 곳을 중간에 고르는 편이 자연스럽다.
- 주거지가 많아서 사진은 사람과 집 안이 나오지 않게 조심하는 게 좋다.
북정마을 골목에서 느낀 생활의 온도
북정마을은 규모가 큰 곳은 아니다. 그래서 기대를 크게 잡고 가면 오히려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근데 나는 그 점이 좋았다. 볼거리를 촘촘하게 소비하는 장소가 아니라, 동네가 가진 표정을 천천히 읽는 곳에 가까웠다. 벽화가 아주 화려하게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상점이 줄줄이 늘어선 것도 아니다. 대신 낮은 집들과 좁은 계단, 오래된 전봇대, 골목 끝에서 갑자기 트이는 하늘이 있다.
사실 이런 장소는 여행지로 소개하기가 늘 조심스럽다. 누군가에게는 매일 사는 동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골목 안쪽으로 너무 깊게 들어가기보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 흐름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사진도 몇 장만 찍었다. 조용한 동네를 좋아한다는 말은, 그 조용함을 내가 깨지 않겠다는 태도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적어서 좋았던 순간
가장 좋았던 건 골목 중간에서 잠깐 멈췄을 때였다. 멀리 도심의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앞에서는 누군가의 장독대와 오래된 담장이 보였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한 번에 겹쳐 보이는 느낌이었다. 관광지에서는 보통 앞사람의 뒷모습을 따라 걷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내 걸음의 속도를 내가 고를 수 있었다.
유명한 장소보다 오래 남는 이유
성북동에는 잘 알려진 공간도 많다. 미술관, 고택, 찻집처럼 이름을 들으면 아는 곳들이 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나는 그런 곳들을 전부 들르지는 않았다. 대신 큰길과 골목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지점과 한적한 지점의 차이를 느꼈다. 유명한 장소는 목적지가 되어주지만, 동네의 기억은 대개 그 사이 길에서 생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찻집에 들어가기 전 7분 정도 걸었던 오르막, 담장 옆 그늘에서 잠깐 물을 마신 시간, 오래된 주택 앞에서 방향을 틀며 들었던 생활 소음. 이런 건 지도에 별점으로 남기기 어렵다. 그래도 여행이 끝난 뒤에는 이상하게 그런 장면이 더 선명하다. 솔직히 사진으로 설명하기도 애매하다. 직접 걸었을 때만 남는 감각이 있다.
- 화려한 인증 사진보다 동네의 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맞다.
- 반나절 코스로 충분해서 부담이 적다.
- 혼자 걷기 좋지만, 조용히 걷는 동행과도 잘 어울린다.
- 비 오는 날보다는 맑고 바람 있는 날이 골목 풍경을 보기 좋다.
다시 간다면 조금 덜 계획하고 싶다
다시 성북동에 간다면 목적지를 더 줄일 것 같다. 역에서 출발해 성북로를 걷고, 마음에 드는 골목 하나를 고르고, 잠깐 쉬었다가 내려오는 정도면 충분하다. 여행을 잘했다는 느낌이 꼭 많은 곳을 들렀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날은 적게 봐서 더 많이 남았다.
사람 적은 로컬 장소를 찾는 일은 숨은 보물을 캐는 일과는 조금 다르다. 누군가의 일상 옆을 잠시 빌려 걷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더 조용히 보고, 더 천천히 지나가게 된다. 성북동 언덕길은 그런 태도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동네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서울 안에서, 잠깐 다른 박자로 걸을 수 있는 곳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꽤 고마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