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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억새 명소 찾아 가시리를 걸어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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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억새 명소 찾아 가시리를 걸어봤더니

가시리 들판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억새보다 길이었다. 서귀포시 표선면의 이 마을에는 밭과 목장 사이로 걷는 길이 이어진다. 차 소리가 멀어지자 바람에 쓸리는 풀 소리가 또렷해졌다. 서귀포 억새 명소를 찾다가 오름 하나만 찍고 돌아오기 아쉬워서 왔는데, 오래 기억에 남은 건 오름에 닿기 전의 걸음이었다.

가시리에서 억새를 보러 가는 길

가시리에는 따라비오름과 큰사슴이오름을 잇는 쫄븐갑마장길이 있다. ‘쫄븐’은 제주말로 짧다는 뜻이지만, 전체 길이는 약 10.3km다. 한 바퀴를 걸으면 대략 3시간은 잡아야 한다. 이름만 듣고 가벼운 동네 산책을 떠올렸다면 길이가 의외일 수 있다. 나는 조랑말체험공원 쪽을 출발점으로 삼고, 돌아올 시간부터 생각했다. 억새를 보는 데 꼭 전 구간을 걸을 필요는 없으니까.

이 길은 옛 갑마장이 있던 들판을 지난다. 갑마장은 조선 시대 왕실에 바칠 말을 기르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길에서 보이는 풍경도 흔히 떠올리는 제주의 바다와는 다르다. 낮은 돌담과 풀밭, 멀리 선 풍력발전기 사이로 억새가 이어진다. 가까이서는 한 포기씩 흔들리던 풀이 몇 걸음 뒤에서 돌아보면 넓은 물결처럼 보였다.

사람이 적은 장소를 좋아해도 ‘언제 가도 한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가을 주말의 따라비오름은 억새를 보러 온 사람이 많을 수 있다. 조용히 걷고 싶은 날이라면 이른 시간에 출발해 들판을 천천히 지나고, 사람이 모이는 오름 입구에서 걸음을 줄이는 편이 내게는 잘 맞았다. 바람이 강하면 들판에서도 체감 온도가 낮아져 얇은 겉옷 하나가 유용하다.

따라비오름보다 오래 머문 들판

따라비오름은 억새철 가시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이다. 세 개의 굼부리와 굽은 능선 덕분에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시원하다. 비짓제주 안내에는 정상까지 편도 약 20분, 분화구 둘레를 걸으면 왕복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로 적혀 있다. 숫자로 보면 부담 없어 보이지만 오르는 구간에는 계단이 있다. 서두르지 않고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며 걷는 편이 좋았다.

그런데 내 발걸음이 더 느려진 곳은 정상보다 아래쪽이었다. 길가의 억새는 높이가 조금씩 달라서 바람이 지날 때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기울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풀 안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정해진 길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잠시 멈추면 지나가는 사람의 발소리까지 들렸다. 오름 위의 넓은 풍경이 좋다면, 아래에서는 그 풍경을 이루는 작은 소리가 좋았다.

억새가 은빛으로 보이는 때는 해가 낮게 기울 무렵이다. 다만 늦은 시간에 오름 둘레까지 욕심내면 내려오는 길이 어두워진다. 해 질 무렵의 빛이 목적이라면 올라가는 데 쓸 시간과 내려올 시간을 함께 계산하는 게 편하다. 날씨가 흐리거나 바람이 거센 날에는 색도 분위기도 달라진다. 같은 길을 걸어도 매번 사진처럼 보이리라 기대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이곳답다.

긴 코스가 부담스럽다면 잣성길만

쫄븐갑마장길 전 구간은 산책이라기보다 걷기 여행에 가깝다. 시간이 짧거나 조용한 길 자체가 목적이라면 가시리의 잣성길을 살펴볼 만하다. 잣성은 목장의 경계를 나누던 돌담이다. 비짓제주는 잣성길을 약 30~40분 걷는 길로 소개한다. 오름 정상에서 보는 억새의 규모와는 다르지만, 돌담과 풀밭을 가까이 두고 걷는 맛이 있다.

큰사슴이오름, 또는 대록산 쪽으로 걸음을 늘릴 수도 있다. 이쪽은 억새밭 너머로 둥근 오름이 보이는 구간이 인상적이다. 다만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는 계단이 많고, 입구 위치도 주소만으로 찾기 어려울 수 있다. 오름마다 주차 공간이나 출입 상태가 다를 수 있으니 출발 전에 비짓제주 안내를 확인해두는 편이 낫다. 나는 동선이 헷갈릴 때마다 더 멀리 가기보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쪽을 택한다.

마을의 시간을 지나며

억새가 가장 풍성한 때는 대체로 10월에서 11월 사이다. 그렇다고 꽃이 많이 핀 날만 가시리가 좋은 건 아니다. 들판으로 나가는 길에는 마을의 생활이 함께 있다. 밭으로 드나드는 차량이 지나고, 돌담 뒤에는 누군가의 집과 일터가 있다. 길이 조용하다고 해서 어디든 들어가도 되는 건 아니다. 밭길과 사유지 대신 표시된 탐방로를 따르면 마음도 한결 가볍다.

돌아오는 길에는 억새 사진보다 걷는 동안 자주 멈췄던 순간이 떠올랐다. 바람이 잠깐 잦아들면 풀들이 서 있고, 다시 불면 한꺼번에 몸을 기울였다. 가시리는 유명한 풍경을 하나 보고 떠나기보다 그런 변화를 오래 바라보게 하는 동네였다. 서귀포에서 억새를 보러 간다면, 다음에도 오름에 오르기 전 들판에서 조금 더 시간을 쓸 것 같다.

서귀포 억새 명소 찾아 가시리를 걸어봤더니 -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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