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은행나무 명소를 걷다가 동네가 좋아졌다

지난가을 보문역 근처 성북천을 걷다가, 은행잎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장을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길. 그날 이후 서울 은행나무 명소를 찾을 때면 큰 공원보다 동네 가까운 곳을 먼저 떠올리게 됐다.
이번에 적은 세 곳은 분위기가 서로 다르다. 길게 걸을 수 있는 성북천, 나무 한 그루 앞에서 오래 머물게 되는 방학동, 주택가 골목 끝에서 만나는 가양동이다. 일부러 먼 곳까지 찾아갈 필요 없이, 가까운 곳 하나를 골라 천천히 다녀오기 좋다.
성북천 안감내길은 은행나무를 따라 걷는 길
보문역에서 성북천 쪽으로 나오면 하천을 따라 이어지는 보도가 보인다. 물가로 바로 내려가기 전에 위쪽 길을 걸어보는 편이 좋았다. 은행나무가 길가에 서 있어서 고개를 들면 노란 잎이 보이고, 시선을 내리면 동네의 평범한 풍경이 이어진다. 운동하는 사람과 가게에 들르는 사람이 오가는 길이라 관광지에 온 느낌이 덜하다.
서울시는 이곳 안감내길을 성북천 옆 약 1.5㎞ 은행나무 단풍길로 소개한다. 걸을 거리가 충분하지만 끝까지 채워야 하는 코스는 아니다. 보문역 부근에서 성북구청 방향으로 걷다가 마음에 드는 다리를 만나면 건너가도 된다. 하천 아래 산책로와 위쪽 보도는 보는 높이가 달라서, 같은 나무도 다시 보인다.
솔직히 이 길은 어느 한 지점에서 감탄사가 터지는 곳은 아니다. 잎이 듬성듬성 물든 날에는 기대한 만큼 노랗지 않을 수도 있다. 대신 벤치에 잠깐 앉거나 주변 골목으로 한 블록 들어갔다 나오기 좋다. 성북천을 따라 걷는 시간에 동네 구경을 조금 섞으면, 짧은 외출이 꽤 긴 여행처럼 느껴진다.
방학동에서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본다
도봉구 방학동 은행나무는 늘어선 가로수 대신 한 그루를 보러 가는 곳이다. 원당샘공원과 연산군묘를 함께 찾으면 길을 잡기 쉽다. 방학3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공원 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주택가를 지나 나무 앞에 서면 가지가 뻗은 폭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국가유산포털에는 방학동 은행나무가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올라 있다. 도봉구 관광 안내에서도 원당샘공원, 연산군묘와 이어지는 동네 산책길의 한 부분으로 소개한다. 오래된 나무라는 설명을 알고 봐도 좋지만,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면 크기가 더 실감 난다. 가까이 붙어서 한 장 찍는 것보다 조금 물러서서 집과 길, 나무를 함께 보는 쪽이 이 장소답다.
이곳은 성북천처럼 계속 걸으며 노란 풍경을 보는 곳이 아니다. 바람에 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잠시 기다리다가 원당샘공원으로 발길을 옮기는 식이 어울린다. 공원에는 동네 주민과 둘레길 걷는 사람이 오가니, 나무 아래에 오래 자리를 차지하기보다 길을 비켜 서서 보는 게 편했다. 조용한 곳을 좋아해도 이 동네가 누군가의 생활 공간이라는 점은 잊지 않게 된다.
가양동 성주우물 은행나무는 골목 끝에 있다
가양동에서는 풍경이 조금 더 작아진다. 양천향교역 3번 출구에서 한강 방향으로 가다가 골목 안쪽의 성주우물 은행나무를 찾아가면 된다. 서울시 시민기자의 현장 소개에는 출구에서 약 3분 직진한 뒤 두 번째 골목으로 우회전해 조금 더 걸으면 작은 공원이 나온다고 적혀 있다. 처음 가는 길이라면 큰 은행나무길을 예상하지 않는 편이 좋다.
강서구 문화관광 안내에 따르면 가양동 148-65의 나무는 1988년 보호수로 지정됐고, 성주우물 은행나무라고도 불린다. 이름에 남은 우물 이야기를 알고 나니 아파트와 골목 사이에 선 나무가 다르게 보였다. 여기서는 단풍잎이 바닥을 얼마나 덮었는지보다 오래된 나무가 동네 한가운데 남아 있다는 사실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아도 괜찮다. 나무를 보고 주변 길을 조금 걸으면 이 동네의 평소 속도가 느껴진다. 사진 한 장을 위해 찾아왔다가도, 돌아갈 때는 골목의 조용한 분위기를 함께 가져가게 되는 곳이다.
노란 잎보다 걷는 시간을 남기고 싶다면
은행나무는 같은 서울 안에서도 물드는 때가 조금씩 다르고, 비바람 뒤에는 잎이 금세 떨어진다. 그래서 날짜를 딱 맞추기보다 늦가을의 맑은 날을 골라 가볍게 걷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낙엽이 젖었을 때는 미끄러운 구간을 조심하고, 열매가 떨어진 자리도 살피며 걷는다.
세 곳을 하루에 모두 돌 필요는 없다. 성북천에서는 길을, 방학동에서는 나무의 시간을, 가양동에서는 골목의 크기를 보게 된다. 서울의 가을이 좋았던 순간은 노란 잎이 가장 빽빽했던 장면보다, 그 아래에서 평소처럼 하루를 보내는 동네를 만났을 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