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파리 여행에서 페르네티 골목을 걸어봤더니

겨울 파리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건 유명한 건물보다 빵집 앞에 잠깐 서 있던 아침이었다. 지하철 13호선 페르네티역에서 나와 14구 골목을 걸었다. 사람들이 출근하고 장을 보는 동네라 여행자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좋았다. 쇼윈도에 비친 흐린 하늘을 보고,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다음 모퉁이까지 천천히 걸었다.
페르네티역에서 서두르지 않고 출발했다
역 주변은 조용한 주택가만 있는 곳은 아니다. 레몽 로스랑 거리에는 식료품점과 꽃집, 식당이 이어져 있어서 오가는 사람이 꽤 있다. 그런데 큰길에서 한두 번만 방향을 틀면 발걸음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 골목이 나온다. 겨울 파리 여행에서 이런 변화가 유난히 반가웠다. 관광 명소 앞의 긴 줄을 보고 하루를 시작할 때와는 몸의 속도가 달라진다.
나는 평일 오전에 역에서 나와 레몽 로스랑 거리의 가게들을 구경하다가 시테 보에르 쪽으로 걸었다. 이 구간은 길을 빨리 찾는 것보다 모퉁이에서 잠깐 멈추는 편이 재미있다. 문 앞에 놓인 화분이나 낮은 집의 덧문처럼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다만 이곳은 누군가 사는 동네다. 열린 문이 보여도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길에서 보이는 만큼만 봤다.
시테 보에르와 테르모필 골목의 겨울 얼굴
시테 보에르에는 낮은 집들이 이어진다. 담장과 문 모양이 제각각이라 몇 걸음마다 풍경이 조금씩 달라졌다. 잎이 무성한 계절의 사진을 기대하고 오면 겨울은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내가 걸은 날에도 덩굴은 대부분 앙상했다. 대신 가지 사이로 벽돌과 창틀이 잘 보였다. 여름의 골목이 초록색이라면 겨울의 골목은 집의 윤곽을 보는 시간에 가까웠다.
이어 걸은 테르모필 거리는 짧은 돌길이다. 이름을 알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는 곳이라 늘 비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내가 지나간 평일 오전에는 몇 사람이 조용히 걸어갈 뿐이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길 가운데 오래 서 있기보다 한쪽으로 비켜서서 골목 끝까지 걸었다. 화려한 장식은 없는데, 작은 집과 오래된 벽이 가까이 붙어 있어 도시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잠깐 잊게 했다.
겨울에는 바닥이 젖어 있으면 돌길이 미끄럽게 느껴질 수 있다. 나는 밑창이 평평한 신발보다 걷기 편한 운동화가 나았다. 손이 시릴 때는 장갑을 끼고 사진도 몇 장만 찍었다. 이 길에서는 카메라를 내리는 시간이 더 길었으면 좋겠다. 짧은 골목이라 오래 머물려고 애쓰면 오히려 남의 집 앞을 서성이는 모양이 된다.
골목 밖에서 만난 동네의 평범한 시간
테르모필 거리를 빠져나와 다시 레몽 로스랑 거리로 돌아오니 가게 문 여는 소리와 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는 번잡하게 느껴졌던 길인데, 조용한 골목을 다녀오고 나니 동네의 생활감이 더 선명했다. 꽃집 앞에서는 물을 뿌린 바닥이 반짝였고, 식료품점 앞에서는 장바구니를 든 사람들이 걸음을 늦췄다. 파리까지 와서 이런 장면을 보고 있다는 게 조금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내 여행에서는 이런 시간이 오래 남는다.
걷다가 추워지면 가까운 가게에서 따뜻한 음료를 마시며 쉬었다. 특정 카페를 목표로 정하지 않으니 빈자리가 보이는 곳에 들어가기가 편했다. 메뉴판을 오래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잔을 잡고 손을 녹이는 동안 창밖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골목 산책을 한 번에 끝내겠다고 욕심내기보다 중간에 실내로 들어가는 편이 겨울에는 훨씬 느긋했다.
겨울이라 짧게 걷는 편이 좋았다
이날의 산책은 페르네티역에서 시작해 시테 보에르와 테르모필 거리를 둘러보고, 큰길의 가게 앞을 지나 다시 역 쪽으로 돌아오는 정도였다. 골목 자체는 금방 걸을 수 있지만 나는 쉬는 시간을 포함해 한두 시간 남짓 머물렀다. 해가 짧은 계절이라 오후 늦게 새 동네를 찾아 헤매기보다 낮에 걷고 추워지면 돌아오는 일정이 잘 맞았다.
사람이 적은 곳을 찾는다고 해서 그곳을 비밀 장소처럼 대할 수는 없다. 페르네티의 골목도 주민에게는 매일 드나드는 길이다. 그래서 겨울 파리 여행에서 내가 가져온 가장 좋은 기억은 아무도 없는 사진이 아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조용히 길을 걷다가, 다시 가게 불빛이 켜진 일상의 거리로 나왔던 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