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여행에서 일부러 번화가를 비켜 걸어봤더니 남은 장면들

얼마 전 뉴욕을 다시 걸었는데, 이상하게도 타임스스퀘어보다 동네 세탁소 앞에 오래 서 있게 됐다. 번쩍이는 전광판은 몇 분만 봐도 배가 부른데, 아침 장을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 공원 벤치에서 커피를 식히는 사람들, 낡은 벽돌집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은 오래 봐도 질리지 않았다.
뉴욕여행이라고 하면 보통 자유의 여신상, 브로드웨이, 센트럴파크 남쪽, 소호 쇼핑 거리를 먼저 떠올린다. 물론 한 번쯤은 볼 만하다. 그런데 사람이 적은 뉴욕은 그보다 한두 블록 옆에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10분만 더 걷거나, 유명한 거리에서 방향을 살짝 틀면 여행자보다 주민이 더 많은 장면이 나온다.
아침 8시, 브루클린 하이츠 산책로의 조용한 얼굴
브루클린 하이츠 산책로는 맨해튼 스카이라인을 보는 장소로 꽤 알려져 있지만, 시간대를 잘 고르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내가 갔던 날은 오전 8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고,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보다 출근 전에 강을 보는 동네 사람이 더 많았다. 벤치마다 사람이 가득한 정도는 아니었고, 30분쯤 걸으면서 마주친 여행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곳의 좋은 점은 풍경이 크지만 소리가 작다는 데 있다. 멀리 맨해튼이 보이는데, 발밑은 조용한 주택가다. 갈색 벽돌 건물, 작은 계단, 가로수 아래 주차된 자전거가 이어진다. 사실 뉴욕에서 스카이라인을 보는 곳은 많지만, 이 동네는 보는 사람의 속도를 늦춘다. 사진 한 장 찍고 이동하는 장소라기보다, 커피 한 잔 들고 천천히 앉아 있기 좋은 곳에 가깝다.
가는 길에서 더 오래 머물렀던 골목
지하철을 타고 클락 스트리트 근처에서 내려 강 쪽으로 걸었다. 역을 나오자마자 관광지라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작은 식료품점, 학교 앞 횡단보도,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 사이로 7~8분 정도 걸으면 산책로가 나온다. 근데 나는 산책로보다 그 전 골목에서 발걸음이 더 자주 멈췄다. 오래된 집 현관마다 다른 색의 문이 있고, 창틀마다 생활감이 얹혀 있었다.
뉴욕여행 중 사람이 많은 장소에 지쳤다면 이 동네는 오전에 가는 편이 낫다. 점심 이후에는 브루클린 브리지 쪽에서 넘어오는 여행자가 늘고, 해 질 무렵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아진다. 조용한 분위기를 원한다면 오전 8시부터 10시 사이가 가장 편했다.
그리니치 빌리지, 유명한 거리 말고 옆 골목
그리니치 빌리지는 이름만 들으면 이미 유명한 동네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막상 걸어보면 큰길과 작은 골목의 온도 차가 꽤 크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 주변은 늘 사람이 많지만, 공원에서 서쪽으로 5분만 벗어나면 갑자기 발소리가 또렷해진다. 낮은 건물과 오래된 재즈 바 간판, 작은 카페의 야외 의자가 이어진다.
내가 좋았던 길은 지도에서 별표를 찍고 찾아간 곳이 아니었다. 공원 북쪽의 복잡함을 피해 걷다가 우연히 만난 좁은 골목이었다. 보도는 넓지 않았고, 배달 트럭이 지나가면 잠깐 옆으로 비켜서야 했다. 그런데 그런 불편함이 오히려 동네를 더 가깝게 느끼게 했다. 뉴욕이 늘 빠르고 거대한 도시만은 아니라는 걸, 이런 골목에서 알게 된다.
- 사람이 적은 시간은 평일 오전 10시 전후가 편했다.
- 카페는 큰 프랜차이즈보다 2~3테이블짜리 작은 곳이 분위기가 좋았다.
- 지도에 저장한 장소보다 걷다가 보이는 골목을 따라가면 더 자연스럽다.
솔직히 말하면 그리니치 빌리지는 아주 숨겨진 동네는 아니다. 다만 여행자가 몰리는 지점이 분명해서, 그 지점만 피하면 다른 얼굴이 열린다. 같은 동네 안에서도 200미터 차이로 소음이 줄어드는 느낌이 뚜렷했다.
루스벨트 아일랜드에서 본 뉴욕의 느린 옆모습
뉴욕여행에서 의외로 오래 기억에 남은 곳은 루스벨트 아일랜드였다. 맨해튼과 퀸스 사이에 길게 놓인 섬인데, 도심과 가깝지만 이상하게 조금 떨어져 있는 기분이 든다. 트램을 타고 들어가면 몇 분 만에 도착하지만, 내려서는 순간 속도가 바뀐다. 차 소리보다 강바람 소리가 먼저 들린다.
섬 남쪽으로 걸으면 강 건너 맨해튼의 빌딩들이 보인다. 그런데 바로 옆에 있는 풍경인데도 조급하지 않다. 산책로는 평평하고 길도 단순해서 길을 잃을 걱정이 적다. 내가 걸었던 구간은 왕복 1시간 정도면 충분했지만, 중간중간 벤치에 앉다 보니 2시간 가까이 머물렀다.
관광지보다 생활권에 가까운 섬
루스벨트 아일랜드에는 여행자를 위한 과한 장식이 거의 없다. 아파트 단지, 작은 슈퍼, 학교, 병원 건물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그래서 처음엔 살짝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심심함이 이곳의 장점이다. 뉴욕에서 굳이 뭔가를 해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트램은 날씨가 맑은 날에 타면 짧지만 인상적이다. 다만 사람이 몰리는 시간에는 창가 자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나는 오전 늦게 들어가서 점심 무렵 나왔는데, 줄이 길지 않아 편했다. 왕복 이동까지 합쳐도 반나절이면 충분해서, 빡빡한 일정 중간에 숨을 고르기 좋았다.
어퍼웨스트사이드, 센트럴파크 밖의 평범한 오후
센트럴파크를 걷다 보면 남쪽은 늘 붐빈다. 말차를 든 사람, 자전거 투어, 사진 촬영팀이 계속 지나간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 공원 안쪽보다 어퍼웨스트사이드의 바깥길로 빠져나왔다. 80번대 스트리트 주변을 걸었는데, 관광지라기보다 생활 동선에 가까웠다.
이 동네에서는 특별한 목적지를 잡지 않는 편이 좋았다. 작은 서점, 오래된 델리, 아파트 현관 앞에 놓인 택배 상자, 아이를 데리러 나온 부모들. 그런 장면들이 뉴욕을 훨씬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유명 미술관이나 전망대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밀도가 있었다.
점심은 화려한 레스토랑보다 동네 델리에서 간단히 먹었다. 샌드위치 하나와 커피를 사서 근처 작은 벤치에 앉았는데, 가격도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했고 시간도 아낄 수 있었다. 물론 뉴욕 물가는 여전히 만만하지 않다. 그래도 줄 서서 1시간을 보내는 식당보다, 동네 사람들이 빠르게 들르는 가게가 여행 피로를 덜어줄 때가 많다.
뉴욕에서 한적함을 찾을 때 생각해둘 것들
뉴욕은 사람이 적은 도시가 아니다. 그래서 완전히 비어 있는 장소를 기대하면 실망할 수 있다. 대신 붐비는 시간과 동선을 피하는 방식이 더 현실적이다. 유명 장소에서 10분 거리, 평일 오전, 역에서 바로 보이지 않는 방향. 이 세 가지를 기억하면 여행의 결이 많이 달라진다.
- 사진 명소는 해 질 무렵보다 오전이 훨씬 조용했다.
- 지하철 출구 바로 앞보다 2~3블록 안쪽 골목이 편했다.
- 큰 공원은 입구보다 북쪽이나 가장자리 산책로가 덜 붐볐다.
- 식사는 예약 맛집보다 동네 델리나 작은 카페가 부담이 적었다.
뉴욕여행을 처음 간다면 대표적인 장소를 아예 건너뛰기는 어렵다. 나도 그 마음을 안다. 다만 하루 중 반나절 정도는 이름난 장소를 비워두고, 그냥 동네를 걷는 시간으로 남겨두면 좋겠다. 그 시간이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내가 기억하는 뉴욕은 높은 빌딩보다, 브루클린의 아침 벤치와 루스벨트 아일랜드의 느린 바람에 더 가깝다. 여행은 꼭 대단한 장면을 모아야 완성되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의 평범한 하루 옆을 조용히 지나가는 순간에도, 충분히 먼 곳에 와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