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호텔을 탑동에 잡았더니 골목이 남았다

얼마 전 제주에서 돌아오는 날, 사진첩을 넘기다가 바다보다 골목 사진이 더 많은 걸 발견했다. 아침에 문을 여는 가게, 빨래가 걸린 창문, 출근길에 오토바이가 잠깐 멈춰 선 횡단보도 같은 장면들이다. 이번에는 관광지를 많이 보겠다는 계획 없이 제주시 탑동 근처에 제주도호텔을 잡았다. 숙소에서 나와 걷다가 마음에 드는 길로 들어가는 시간이 여행의 대부분이었다.
바다보다 걸어 나갈 길을 보고 숙소를 골랐다
예전에는 제주도호텔을 찾을 때 바다 전망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전망 좋은 방에 머문 날에도 정작 창밖을 보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번에는 기준을 바꿨다. 호텔 문을 나서서 산지천과 오래된 상점가까지 걸어갈 수 있는지, 밤에 돌아오는 길이 너무 외지지는 않은지 먼저 봤다. 탑동 쪽 숙소를 고른 것도 그 때문이다. 바닷가와 제주시 원도심을 한 번에 걸을 수 있는 위치였다.
방을 고를 때는 전망보다 창문 방향과 주변 도로를 유심히 봤다. 조용한 여행을 원한다면 ‘바다 근처’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탑동 광장 쪽은 저녁에 산책하는 사람이나 공연으로 활기가 생기기도 한다. 내가 묵은 곳에서도 밖으로 나가면 바다를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숙소 안에서는 창을 닫고 쉬는 시간이 더 좋았다. 한적함은 동네 이름보다 방의 위치와 머무는 시간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지천을 따라가면 여행지보다 동네가 보인다
첫날 아침에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산지천 쪽으로 걸었다. 물길 옆에서는 차가 지나는 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다리 하나를 건너고, 다시 골목으로 들어가니 간판을 올리는 가게와 장을 보러 가는 사람이 차례로 보였다. 산지천을 따라 칠성로와 동문시장 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제주관광공사도 원도심 산책길로 소개하는 곳이다. 실제로 걸어보니 길을 찾는 일보다 어느 모퉁이에서 잠깐 멈출지가 더 어려웠다.
동문시장은 조용한 장소를 기대하고 들어가면 다소 어긋날 수 있다. 특히 손님이 몰리는 구간에서는 발걸음도 자연히 빨라진다. 나는 시장을 오래 돌기보다 필요한 먹거리를 사고 바깥 골목으로 빠졌다. 몇 걸음만 옮겨도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소리가 잦아든다. 오래된 건물 사이에 작은 가게가 섞인 칠성로 주변에서는 새로 생긴 가게만 찾아다니지 않았다. 닫힌 셔터와 낡은 벽까지 함께 보아야 이 동네의 하루가 조금 더 온전히 보였다.
일정을 비워 두니 관덕정 가는 길도 달라졌다
다음 날에는 관덕정 쪽으로 걸었다. 지도를 켜면 곧장 갈 수 있는 길이 나오지만, 큰길만 따라가지는 않았다. 사람이 사는 골목에서는 창문이 열려 있거나 차가 드나드는 집 앞을 조용히 지나갔다. 골목은 누군가의 생활 공간이라 사진을 찍을 때도 집 안이나 얼굴이 담기지 않도록 한 번 더 확인하게 된다. 여행자가 천천히 걷는 속도와 주민이 하루를 보내는 속도가 잠깐 겹치는 곳이 좋았다.
관덕정에 이르러서는 잠시 앉아 쉬었다. 이름난 장소여도 그곳까지 걸어온 길이 다르면 기억에 남는 모습도 달라진다. 나는 건물 앞에서 찍은 사진보다 가는 길에 본 작은 식료품점이 더 또렷하다. 물 한 병을 사고 다시 걷기 시작했을 뿐인데, 그런 평범한 동작이 여행을 내 일상에 가깝게 만들어 줬다. 일정표에 적어 둔 곳을 하나 더 지우는 기분도 없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저녁까지가 좋았다
해가 기울 무렵에는 탑동 바닷가로 돌아왔다. 이곳은 늘 비어 있는 산책로는 아니다. 걷는 사람도 있고, 행사가 열리면 제법 소란스러울 수 있다. 그래도 낮에 지나온 골목을 거쳐 바다 앞에 서니 처음 보는 풍경처럼 낯설지 않았다. 잠깐 바람을 맞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저녁거리를 샀다.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하루가 충분히 길었다.
제주도호텔을 찾는다면 숙소 사진만큼 문밖의 길을 들여다보면 좋겠다. 동문시장 가까이에서 먹고 걷고 싶은지, 탑동 바다를 저녁마다 보고 싶은지에 따라 같은 원도심에서도 머무는 느낌이 달라진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아침 일찍 골목을 걷고, 붐비는 곳에서는 조금 물러나는 방식이 잘 맞았다. 다음에 제주에 가더라도 유명한 곳을 몇 군데 더 채우기보다, 낯익어질 만한 동네에 며칠 머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