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2월 해외여행지 오노미치를 걸어봤더니

늦가을 오노미치역 앞에 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바다보다 건널목을 오가는 동네 사람들이었다.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람, 장바구니를 든 사람 사이에 섞여 몇 걸음 걷자 여행지에 왔다는 들뜸이 조금 가라앉았다. 11월 12월 해외여행지를 고를 때 내가 바라는 건 이런 순간이다. 유명한 풍경 하나를 보고 돌아오는 대신, 그곳의 평범한 하루에 잠시 들어가 보는 것.
오노미치역에서 여행의 속도가 달라졌다
일본 히로시마현의 오노미치는 바다와 산 사이에 길게 자리한 항구 도시다. 후쿠야마역에서 일반 열차로 약 20분, 히로시마역에서는 미하라를 거치는 일반 열차로 약 80분 걸린다고 일본정부관광국은 안내한다. 한국에서 곧장 오노미치로 들어가는 일정이 아니라면 환승은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역에 도착한 뒤에는 큰 교통수단을 계속 갈아탈 필요가 적었다. 항구 쪽 평지와 산비탈의 골목이 가까워서, 하루를 걷는 데 쓰기 좋았다.
역 앞에서는 일단 물가를 따라 걸었다. 배가 드나드는 수로 너머로 섬이 보이고, 뒤돌아보면 집들이 비탈을 따라 올라가 있다. 풍경이 화려하게 펼쳐진다기보다 시선을 돌릴 때마다 조금씩 바뀐다. 나는 그런 도시에서 자꾸 걸음이 느려진다. 사진 한 장 찍고 떠나기보다 같은 길을 두 번 지나며 아침과 저녁의 표정을 비교하게 된다.
상점가에서 한 블록만 벗어나도
오노미치 상점가에는 오래된 가게와 새로 생긴 카페가 섞여 있다. 구경하기 편한 길이지만, 사람 적은 장소를 찾는다면 상점가 자체보다 옆으로 난 길이 더 기억에 남는다. 간판이 줄어들고 주택의 현관이 가까워지는 순간,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낮아진다. 주민이 사는 골목이니 사진을 찍을 때는 집 안쪽이나 창문을 향해 카메라를 들지 않는 편이 마음 편했다.
골목을 걷다가 가게가 보이면 잠깐 들어가고, 닫혀 있으면 그냥 지나갔다. 작은 도시의 가게는 영업시간이 여행자의 계획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식사는 보이는 곳에서 너무 늦지 않게 해결했다. 오노미치 라멘이 알려져 있지만, 꼭 그 한 그릇을 먹어야 하루가 완성되는 건 아니었다. 동네 빵집에서 산 빵을 들고 항구 쪽으로 돌아오는 길도 충분히 좋았다.
언덕길은 천천히 올라야 좋았다
오노미치의 산 쪽 골목은 계단과 좁은 돌길이 이어진다. 일본정부관광국도 이 도시를 가파른 비탈과 굽이치는 계단이 많은 곳으로 소개한다. 지도에서는 가까워 보이는 두 지점 사이에도 오르막이 숨어 있다. 나는 욕심내서 여러 절을 한꺼번에 돌기보다, 눈앞에 보이는 계단 하나를 올라갔다가 바다가 보이는 틈에서 멈추는 쪽이 좋았다.
센코지 주변은 오노미치에서 잘 알려진 곳이라 시간대에 따라 방문객이 모인다. 조용히 걷고 싶다면 그곳만 목적지로 찍고 서두르기보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을 다르게 잡는 편이 낫다. 계단 옆 담장, 오래된 지붕, 낮은 담 너머로 보이는 수로가 차례로 나타난다. 다만 골목이 생활 공간인 만큼 길을 막고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편한 신발도 꼭 필요했다. 평지에서 한 시간 걷는 것과 이곳에서 한 시간 걷는 건 다리의 느낌이 꽤 다르다.
11월과 12월 사이에서 고른다면
두 달 중 걷기 편한 쪽은 내게 11월이다. 일본 기상청의 1991~2020년 평년값에서 히로시마의 월평균 기온은 11월 12.9도, 12월 7.5도다. 오노미치 자체의 수치는 아니지만 가까운 지역의 계절 차이를 가늠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11월에는 가벼운 겉옷에 얇은 옷을 겹쳐 입고 언덕을 오르기 좋았고, 12월이라면 바닷바람을 막을 외투가 더 든든하겠다. 특히 해가 진 뒤 항구에 오래 앉아 있을 생각이라면 낮 기온만 보고 옷을 챙기기 어렵다.
사람이 적은 여행을 원한다면 날짜도 풍경만큼 중요하다. 주말의 유명 전망 지점은 작은 도시라도 북적일 수 있다. 평일 아침에 상점가 바깥 골목을 먼저 걷고, 가게들이 문을 열 무렵 평지로 내려오는 흐름이 내 취향에 맞았다. 반대로 이른 아침부터 영업 중인 가게를 기대하면 허탕을 칠 수도 있다. 산책과 식사 시간을 느슨하게 나눠 두면 마음이 덜 바빠진다.
오노미치에서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은 이름 붙은 명소가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와 다시 평지에 닿았을 때, 누군가 자전거를 밀고 지나가고 항구에는 평소처럼 배가 떠 있었다. 11월과 12월의 해외여행이 꼭 따뜻한 해변이나 큰 축제일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조금 쌀쌀해도 천천히 걸을 수 있는 동네 하나면, 며칠의 기억이 꽤 오래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