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먼플레이스
제너럴리스트의 色다른 이야기

항공권을 끊고 제주 골목에서 하루를 보냈다

Last Updated :
항공권을 끊고 제주 골목에서 하루를 보냈다

얼마 전 제주행 항공권을 끊어 놓고도 한참 동안 갈 곳을 정하지 못했다. 유명한 풍경을 다시 보는 것도 좋지만, 이번에는 동네가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일정표에는 큰 관광지 이름 대신 동쪽 마을에서 걷기, 밥 먹기, 쉬기만 적었다.

항공권을 고를 때부터 하루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항공권을 찾을 때 가장 싼 숫자부터 봤다. 이번에는 도착한 뒤의 시간을 먼저 생각했다. 이른 비행기를 타면 하루가 길어지지만, 새벽부터 서두른 피로가 남는다. 반대로 늦게 도착하면 첫날은 숙소에 짐을 놓는 사이 저물기 쉽다. 가격 차이를 몇 번이나 비교하다가, 공항에서 나와 점심을 먹고 천천히 동쪽으로 갈 수 있는 편을 골랐다.

표를 결제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느긋해졌다. 하루에 세 곳씩 표시해 둔 지도를 지우고, 종달리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바다와 가까운 마을이지만, 내가 보고 싶었던 건 바다 앞에서 찍는 사진보다 골목 안쪽의 평범한 오후였다. 항공권 한 장이 여행을 시작하게 했다면, 빈 일정은 그곳에 머물 자리를 만들어 준 셈이다.

종달리 골목에는 생활의 속도가 있었다

마을에 닿아 먼저 한 일은 목적지를 향해 걷는 일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내려 잠깐 서서 어느 길이 덜 붐비는지 살폈다. 사람을 따라 큰길로 걷다가 주택 사이로 난 골목으로 들어갔다. 낮은 담 너머로 빨래가 보이고, 문 앞에 놓인 화분 옆으로 바람이 지나갔다. 특별한 장면은 없었는데, 그 점이 좋았다.

골목은 조용했지만 비어 있지는 않았다. 차가 드나들고, 누군가는 집 앞을 쓸고 있었다. 여행자가 보기에는 한적한 길이어도 누군가에게는 매일 쓰는 길이다. 사진을 찍고 싶을 때도 집 안이 보이거나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카메라를 내렸다. 여기서는 느리게 걷는 것만큼 조심스럽게 걷는 일도 필요했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나오니 같은 마을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걸음이 빨랐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익숙한 담장과 갈림길이 눈에 들어왔다. 짧게 머물러도 한 길을 두 번 걸으면 그런 순간이 있다. 지도를 들여다보는 시간보다 주변을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밥 한 끼 뒤에 남은 오후

점심은 오래 검색하지 않고 문이 열린 작은 식당에서 먹었다. 메뉴를 고르고 자리에 앉자 아침부터 이어진 이동이 그제야 끝난 듯했다. 관광지에서는 다음 장소에 늦을까 봐 밥을 서두른 적이 많았다. 이날은 그럴 이유가 없어서 물을 한 잔 더 마시고 밖의 움직임을 바라봤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골목을 더 찾아다니기보다 잠시 쉬었다. 사람 적은 장소를 좋아한다고 해서 계속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같은 자리에 머물면 지나가는 차 소리와 바람 소리가 번갈아 들리고, 아까는 보이지 않던 가게 문 앞의 작은 표정도 보인다. 솔직히 그 오후에 한 일은 많지 않다. 그래서 하루가 흐릿하게 뭉개지지 않고 장면마다 남았다.

제주에 오면 꼭 해야 한다는 일을 몇 가지 빼니 이동도 단순해졌다. 목적지가 많을수록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짐을 챙기는 일이 늘어난다. 이번에는 돌아갈 시간을 가끔 확인하는 정도면 충분했다. 항공권을 사며 확보한 여행 시간이 이동을 채우는 데 쓰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다음 항공권에서도 생각할 것

한적한 여행이 언제나 조용한 장소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같은 골목도 요일과 시간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고, 마을 안에는 여행자보다 먼저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다음에도 항공권을 예약하면 유명한 곳의 빈 시간을 찾기보다, 한 동네에서 보낼 넉넉한 시간을 먼저 남겨 두려고 한다.

이번 제주에서 가장 오래 기억나는 건 전망이 아니라 골목을 한 번 돌아 나와 다시 걸었던 순간이다. 처음 보는 길인데도 조금 친숙했고,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어깨가 풀렸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왔지만 좋았던 시간은 동네의 평범한 오후와 가까웠다.

항공권을 끊고 제주 골목에서 하루를 보냈다 - 요약
항공권을 끊고 제주 골목에서 하루를 보냈다 | 커먼플레이스 : https://commonplace.kr/10624
제너럴리스트의 色다른 이야기
커먼플레이스 © commonplace.kr All rights reserved. powered by modoo.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