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부여행, 유명한 뷰포인트 대신 동네길을 걸어봤더니

관광지 사이에 비어 있던 조용한 시간
얼마 전 미국서부여행을 하면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장면은 의외로 그랜드캐니언의 큰 절벽도,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도 아니었습니다. 해 질 무렵 동네 세탁소 앞 벤치에 앉아 있던 사람들, 작은 타코 가게에서 번호표를 들고 기다리던 7분, 주택가 담장 너머로 천천히 넘어가던 햇빛 같은 것들이 더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미국 서부는 워낙 유명한 장소가 많아서 일정이 쉽게 커집니다.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라스베이거스, 국립공원 몇 곳을 잇다 보면 하루에 300km 넘게 운전하는 날도 생기고요. 그런데 저는 그 사이에 일부러 반나절씩 비워두었습니다. 유명 스폿 하나를 덜 가더라도 동네를 걸어보는 쪽이 제 여행에는 더 잘 맞았습니다.
사람이 적은 곳을 찾는다고 해서 완전히 아무도 없는 장소만 말하는 건 아닙니다. 현지 주민이 장을 보고, 커피를 마시고, 개를 산책시키는 리듬이 보이는 곳. 여행자보다 생활자가 더 많은 거리. 그런 곳에 서 있으면 도시가 조금 덜 포장된 얼굴로 다가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바다보다 먼저 동네를 걸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보통 피어 39나 유니언스퀘어, 금문교 전망대를 먼저 떠올립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방문 때는 관광지 중심부보다 리치먼드 디스트릭트와 아우터 선셋 쪽으로 더 많이 걸었습니다. 도심에서 버스나 뮤니를 타고 30~45분 정도 나가면 분위기가 확 달라집니다.
리치먼드 쪽은 낮은 건물과 작은 식당이 이어지고, 아침에는 베이커리 앞에 동네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관광객 줄처럼 길고 빠르게 움직이는 줄이 아니라, 서로 인사하고 메뉴를 천천히 고르는 줄입니다. 근처 그린 애비뉴나 클레멘트 스트리트 주변은 화려하진 않지만, 중국계 식료품점과 오래된 식당, 서점이 섞여 있어 걷는 재미가 있습니다.
아우터 선셋은 더 느립니다. 바다 가까운 주택가라 바람이 세고, 오후가 되면 안개가 내려앉을 때도 많습니다. 솔직히 사진만 보고 기대하면 조금 심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심심함이 좋았습니다. 오션비치까지 걸어가면 넓은 해변이 나오는데, 유명 전망대처럼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카메라를 들고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조깅을 하고, 누군가는 모래 위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습니다.
- 이동 느낌: 다운타운 기준 대중교통 30~45분, 환승이 있어도 어렵지는 않은 편
- 좋았던 시간대: 오전 늦게 출발해 점심 먹고 바다까지 걷는 코스
- 주의할 점: 바람이 꽤 차서 여름에도 얇은 겉옷이 필요함
로스앤젤레스는 차보다 발걸음이 기억났다
로스앤젤레스는 차 없이는 움직이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도시가 크고, 동네 사이 간격도 넓습니다. 그런데 한 동네 안에 들어가면 차를 세워두고 1~2시간 걷는 편이 훨씬 좋았습니다. 특히 프로그타운, 앳워터 빌리지, 하이랜드파크 쪽은 화려한 할리우드 이미지와는 다른 얼굴이 있습니다.
프로그타운은 LA 강을 따라 이어지는 조용한 동네입니다. 강이라고 해도 우리가 떠올리는 자연 하천보다는 콘크리트 수로에 가까운 구간이 많습니다. 근데 그 주변으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 작은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여는 사람, 반려견과 걷는 주민들이 있어서 묘하게 편안합니다. 관광 명소라고 부르기엔 작고,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기엔 분위기가 있습니다.
앳워터 빌리지는 오전에 가기 좋았습니다. 큰 간판보다 작은 상점이 많고, 브런치 가게도 과하게 꾸민 느낌이 덜합니다. 저는 커피 한 잔을 들고 동네 주택가를 천천히 걸었는데, 야자수와 낮은 집들 사이로 보이는 산 능선이 생각보다 오래 남았습니다. LA에서 이런 조용한 풍경을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LA에서 조용한 동네를 고를 때 봤던 기준
- 주차 후 걸어서 1km 안에 카페, 작은 식당, 산책길이 있는지
- 유명 벽화나 포토존보다 생활 상권이 이어지는지
- 해가 진 뒤보다 낮 시간에 걷기 편한 동네인지
이 기준으로 보면 LA 여행이 조금 달라집니다. 명소를 찍고 이동하는 방식보다, 한 동네에 들어가서 점심 먹고 8블록 정도 걷는 방식이 됩니다. 일정표는 덜 빽빽해지지만, 기억은 오히려 더 촘촘해집니다.
사막 여행에서는 이름 없는 길가가 더 좋았다
미국서부여행에서 사막은 빠지기 어렵습니다. 조슈아트리, 데스밸리, 모하비 사막 같은 이름은 익숙하지만, 막상 가보면 유명 전망대보다 이동하는 길 자체가 더 강하게 남을 때가 있습니다.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에서도 저는 대표 포인트를 빠르게 돌기보다, 비교적 덜 붐비는 트레일과 피크닉 구역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예를 들어 바커 댐 트레일은 인기 있는 편이지만, 이른 오전에 가면 비교적 조용합니다. 길이는 약 2km 정도라 부담이 크지 않고, 바위와 조슈아트리가 번갈아 나타나서 사막을 처음 걷는 사람에게도 좋습니다. 더 한적한 느낌을 원한다면 공원 안에서 이름이 덜 알려진 피크닉 에어리어에 차를 세우고 20분만 가만히 있어도 충분합니다. 사막에서는 무언가를 많이 보는 것보다 오래 듣는 시간이 더 어울렸습니다.
다만 사막은 낭만만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여름 한낮에는 기온이 40도 가까이 오르는 날도 있고, 휴대폰 신호가 약한 구간도 있습니다. 물은 생각보다 많이 필요합니다. 저는 1인당 최소 2리터 이상을 차에 두고, 짧은 산책에도 물병을 들고 나갔습니다. 풍경은 느긋하지만 준비는 꽤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덜 유명한 곳을 좋아한다면 일정도 작게 짜야 한다
사람 적은 로컬 장소를 찾는 여행은 욕심을 줄이는 쪽에 가깝습니다. 하루에 도시 하나, 동네 하나, 식사 두 번 정도면 충분한 날이 있습니다. 미국 서부는 거리감이 한국과 달라서 지도상 20분도 실제로는 주차와 신호, 고속도로 진입까지 더해져 금방 40분이 됩니다. 유명 관광지를 많이 넣을수록 동네를 느낄 시간이 사라집니다.
제가 괜찮다고 느낀 방식은 오전에 한 동네를 걷고, 오후에는 다음 도시로 이동하거나 숙소 근처에서 쉬는 식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리치먼드에서 점심을 먹고 오션비치를 본 뒤 숙소로 돌아왔고, LA에서는 앳워터 빌리지에서 오전을 보내고 오후에는 그리피스파크 아래쪽만 가볍게 걸었습니다. 별것 아닌 일정처럼 보이지만 피로가 덜 쌓였습니다.
숙소도 중요했습니다. 중심 관광지 바로 앞보다, 밤에 너무 외지지 않으면서 아침에 걸어 나갈 카페가 있는 동네가 편했습니다. 렌터카 여행이라면 주차 가능 여부를 먼저 봐야 하고, 대중교통 여행이라면 버스 정류장까지 실제 도보 시간이 중요합니다. 미국은 같은 800m라도 인도 상태와 횡단보도 위치에 따라 체감이 꽤 다릅니다.
화려하지 않아서 다시 생각나는 여행
미국서부여행을 떠올리면 거대한 자연과 넓은 도로가 먼저 생각나지만, 제 마음에 남은 건 조금 더 작은 장면들이었습니다. 안개 낀 샌프란시스코 주택가, LA 강 옆 자전거길, 사막 피크닉 테이블에 놓인 미지근한 물병 같은 것들입니다.
유명한 장소를 보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그 사이에 비어 있는 동네 시간을 조금 넣으면 여행이 덜 급해집니다. 남들이 많이 가는 곳을 하나 덜어내고, 현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길을 30분만 걸어도 도시의 온도가 달라집니다. 저는 다음에 미국 서부를 다시 간다면 더 유명한 곳보다 더 평범한 골목을 먼저 찾아갈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