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제주도관광 말고, 동네 길로 걸어봤더니 보인 것들

얼마 전 제주에 다녀왔는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바다보다 동네 골목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공항에서 차로 20분만 벗어나도 사람 소리가 잦아들고, 낮은 돌담 옆으로 빨래가 흔들리는 길이 나온다. 제주도관광이라고 하면 보통 성산일출봉, 협재해수욕장, 카페 거리부터 떠올리지만, 사실 제주가 오래 보여주는 얼굴은 그런 곳보다 조금 뒤쪽에 있었다.
나는 유명한 포토존을 따라가기보다 버스 정류장에서 한두 정거장 일찍 내려 걷는 편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목적지는 분명 있었지만, 실제로 좋았던 건 목적지에 닿기 전의 골목, 오래된 슈퍼 앞 평상, 동네 어르신들이 앉아 있던 작은 그늘이었다.
관광지 옆길로 빠졌더니 여행 속도가 달라졌다
제주에서 사람이 많은 곳과 한적한 곳은 생각보다 가까이 붙어 있다. 예를 들어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차가 줄지어 서 있는 카페가 나오는데, 거기서 300m만 안쪽 마을길로 들어가도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바다는 잠깐 가려지지만, 대신 밭담과 낮은 지붕, 바람에 흔들리는 귤나무가 보인다.
이번에 걸었던 곳은 애월의 큰 도로 뒤편 마을길이었다. 이름난 카페가 몰린 바닷가 쪽은 평일 오후에도 주차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마을 안쪽은 20분을 걸어도 마주친 사람이 다섯 명 남짓이었다. 길은 넓지 않았고, 차가 지나갈 때마다 자연스럽게 담벼락 쪽으로 몸을 붙여야 했다. 그 불편함이 오히려 동네에 들어왔다는 느낌을 줬다.
솔직히 이런 길에는 대단한 볼거리가 없다. 커다란 안내판도 없고, 입장료를 내는 공간도 아니다. 대신 걷는 동안 냄새와 소리가 또렷하다. 젖은 흙 냄새, 멀리서 들리는 경운기 소리, 낮은 창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 같은 것들. 제주도관광의 속도를 조금 늦추면 이런 장면들이 여행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사람 적은 제주를 찾을 때 내가 보는 기준
제주에서 한적한 장소를 찾을 때는 유명하지 않은 지명을 찾는 것보다 시간과 동선을 다르게 잡는 쪽이 더 잘 맞았다. 같은 장소라도 오전 10시와 오후 4시는 분위기가 꽤 다르다. 특히 해안가 전망 좋은 곳은 점심 이후부터 붐비는 경우가 많아서, 나는 되도록 오전 8시 30분에서 10시 사이에 먼저 걷는다.
- 큰 주차장이 없는 곳을 고른다. 차가 많이 못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사람이 줄어든다.
- 카페 이름보다 마을 이름으로 지도 검색을 한다. 예를 들면 해변 이름 대신 근처 리나 포구를 본다.
- 사진 명소에서 도보 10분 이상 떨어진 길을 확인한다. 그 정도만 벗어나도 분위기가 바뀐다.
- 버스 정류장과 마을회관 위치를 본다. 생활 동선이 남아 있는 길은 과하게 꾸며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근데 조용한 곳을 찾는다고 해서 무조건 외진 곳으로 들어가는 건 조심해야 한다. 제주에는 사유지와 밭길이 많고, 길처럼 보여도 주민들이 실제로 쓰는 작업로인 경우가 있다. 돌담 안쪽을 들여다보거나, 밭 가장자리로 무리하게 들어가는 일은 피하는 게 맞다. 한적한 여행은 조용히 머무는 태도까지 포함한다고 느낀다.
내가 오래 머문 작은 포구와 골목
이번 여행에서 가장 오래 앉아 있었던 곳은 제주시 서쪽의 작은 포구였다. 이름을 크게 내세운 관광지는 아니었고, 주변에 기념품 가게도 거의 없었다. 방파제 끝에 앉으니 물빛은 생각보다 짙었고, 바람은 꽤 거칠었다. 30분쯤 앉아 있는 동안 낚시하는 분 두 명, 산책 나온 주민 한 분만 지나갔다.
포구 근처 골목에는 오래된 간판을 단 식당이 하나 있었다. 메뉴는 갈치조림, 고등어구이, 해물뚝배기 정도로 단출했다. 관광객이 줄 서는 식당처럼 빠르고 화려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점심시간이 지나자 동네 분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나는 고등어구이를 먹었는데, 반찬이 여섯 가지쯤 나왔고 가격은 1만 원대 초반이었다. 특별한 맛집이라는 말보다, 하루 식사를 제대로 건넨다는 느낌이 더 가까웠다.
식당을 나와 다시 골목을 걸었다. 담벼락 아래에는 고양이 밥그릇이 놓여 있었고, 어느 집 대문 옆에는 작은 의자가 두 개 나란히 있었다. 여행지에서 이런 물건들을 보면 괜히 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누군가의 생활이 이어지는 곳을 잠시 지나가는 사람이니까.
제주도관광을 조금 덜 소비하듯 다니는 법
제주는 이미 많이 알려진 여행지라 어디를 가도 완전히 비어 있는 공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만 같은 제주도관광이라도 동선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여행의 감촉은 달라진다. 나는 하루에 명소를 세 곳 이상 넣지 않는 편이다. 유명한 곳 하나를 보고, 나머지 시간은 근처 마을이나 포구를 걷는다. 이동 거리는 줄고, 오히려 기억은 더 선명해진다.
예를 들어 서쪽을 간다면 협재나 금능만 보고 끝내기보다, 주변 마을 안쪽 길을 40분 정도 걸어보는 식이다. 동쪽에서는 성산 근처를 지나더라도 일출봉 바로 앞보다 조금 떨어진 식산봉 주변이나 조용한 포구 쪽을 함께 본다. 남쪽에서는 큰 폭포보다 동네 시장 뒤편 길, 오래된 여관과 세탁소가 남아 있는 길이 더 마음에 남을 때가 있다.
물론 날씨가 나쁘면 계획은 금방 틀어진다. 제주 바람은 생각보다 세고, 비가 오면 골목길 걷기도 쉽지 않다. 그럴 때는 욕심을 줄이는 게 낫다. 버스 창밖으로 마을을 보고, 동네 빵집이나 작은 책방에 들어가 잠시 쉬는 것도 여행이다. 사실 제주에서 좋았던 순간들은 대개 계획표 밖에서 생겼다.
조용한 제주를 좋아한다면 남는 것
사람 적은 제주를 찾아다니다 보면 사진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장면이 늘어난다. 파란 바다 앞에서 찍은 선명한 한 장보다, 바람 때문에 머리가 엉킨 채 걷던 길이나 슈퍼 앞에서 마신 캔커피가 더 오래 남는다. 여행이 꼭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주도관광을 조금 다르게 하고 싶다면 유명한 곳을 모두 피할 필요는 없다. 다만 유명한 장소를 본 뒤 바로 다음 명소로 이동하지 말고, 그 주변의 생활권을 잠깐 걸어보면 좋다. 20분만 천천히 걸어도 관광지의 표정과 동네의 표정이 얼마나 다른지 느껴진다.
나는 다음에 제주에 가도 아마 비슷하게 다닐 것 같다. 이름난 풍경을 하나쯤 보고, 그 뒤에는 지도에 크게 표시되지 않은 길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괜찮다. 조용한 골목에서 바람을 맞고, 작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해가 기울 때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 시간. 그런 제주가 내게는 오래 남는 제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