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지추천 통영 서피랑을 천천히 걸어봤더니

얼마 전 통영에서 골목 하나를 걷는데, 바다보다 먼저 빨랫줄과 낮은 담장이 눈에 들어왔다. 서피랑이었다. 통영에 가면 동피랑이나 강구안부터 떠올리기 쉬운데, 그날은 관광지 몇 곳을 빠르게 도는 대신 서피랑 언덕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올라갈 때는 계단에 숨이 찼고, 내려올 때는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작은 길 때문에 자꾸 걸음이 느려졌다.
내가 찾는 국내여행지추천은 대개 이런 곳이다. 볼거리가 끊임없이 나타나는 곳보다, 잠시 멈춰도 어색하지 않은 동네. 서피랑도 전망대만 보고 돌아서면 짧은 코스지만, 골목을 따라 내려오니 통영에서 보낸 한나절이 조금 다르게 남았다.
99계단에서는 서두르지 않는 편이 좋았다
서피랑은 통영 시내 서쪽 언덕에 있는 마을이다. 처음 찾아간다면 지도에서 ‘서피랑 99계단’을 찍는 게 편하다. 통영종합버스터미널에서는 서호동 쪽으로 시내버스나 택시를 이용한 뒤 계단 입구부터 걷기 시작하면 된다. 자가용이라면 주택가의 좁은 길로 바로 들어가기보다 주변 공영 주차장을 먼저 확인하는 편이 마음 편하다.
계단에는 숫자가 적혀 있다. 아래에서 위로 오르며 숫자가 줄어드는 모양이 재미있어서 처음엔 하나씩 들여다봤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난간을 잡고 쉬었다. 이름은 99계단이어도 언덕길은 그 앞뒤로 이어진다. 평소 평지만 걷는 사람이라면 생각보다 다리에 힘이 들어갈 수 있다. 발이 편한 신발을 신고, 비가 온 뒤에는 계단을 천천히 밟는 게 좋겠다.
내가 간 평일 오전에는 계단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을 몇 명 만났지만, 조금 올라서자 발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렇다고 언제나 한적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분위기가 달라질 테고, 계단 자체도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조용히 걷고 싶다면 시간을 넉넉히 잡고 이른 시간에 출발하는 쪽이 어울린다.
서포루에 오르니 골목의 위치가 보였다
계단을 지나 서포루에 닿으면 방금 걸어온 길이 통영 시내 어디쯤 놓여 있는지 감이 온다. 강구안과 항구, 맞은편 동피랑 쪽 풍경이 함께 들어온다. 가까이에서는 집과 지붕이 겹쳐 보이고, 조금 멀리 시선을 두면 물가가 보인다. 전망만 보고 사진 한 장 남길 생각이었는데, 그날은 난간 근처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동피랑이 벽화를 따라 걸으며 다음 장면을 찾는 재미가 있다면, 내가 걸은 서피랑은 위에서 아래를 천천히 바라보는 시간이 좋았다. 바다가 크게 펼쳐지는 순간도 있지만, 서포루로 올라오기 전 지나친 집들이 먼저 생각났다. 언덕 위 전망대가 이 동네의 전부는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서포루까지 올라가는 길은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99계단 쪽이 부담스럽다면 충렬사 부근에서 오르는 길도 살펴볼 만하다. 다만 어느 쪽이든 오르막은 있다. 한국관광공사의 여행 안내도 서피랑을 언덕 산책 코스로 소개한다. 계단 이동이 불편하다면 현장에서 길 상태를 먼저 확인하는 편이 좋다.
내려올 때 만난 서피랑의 일상
서포루에서 내려올 때는 올라온 계단을 그대로 되짚지 않고 명정동 쪽 골목으로 방향을 잡았다. 서피랑 아래에는 명정샘과 서문고개처럼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 등장하는 지명이 남아 있다. 작품을 읽고 온 사람에게는 반가운 이름일 테고, 모르고 걸어도 오래된 동네의 길을 따라가 보는 재미가 있다.
골목에서 마음에 남은 건 특별한 조형물보다 생활의 흔적이었다. 담장 가까이 놓인 화분을 지나고, 사람이 마주 오면 한쪽으로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길을 걸었다. 잠시 멈춰 지도를 보다가도 누군가의 집 앞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발을 옮겼다. 관광객에게는 산책길이지만 주민에게는 매일 오가는 길이다. 사진을 찍을 때도 대문 안쪽으로 카메라를 향하지 않으려고 했다.
길을 잘못 든 듯하면 큰길까지 내려와 다시 방향을 확인하면 된다. 골목을 모두 찾아내겠다고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나는 길 이름 하나를 확인하고, 마음에 드는 모퉁이에서는 조금 더 서 있다가 내려왔다. 그렇게 걷는 동안 서피랑은 ‘숨은 명소’라는 말보다 누군가 계속 살아가는 동네에 가깝게 느껴졌다.
이 동네에서 반나절을 쓰는 방법
내가 걸은 순서는 99계단, 서포루, 명정동 골목 순이었다. 계단만 오르내린다면 금방 끝나겠지만, 중간에 쉬고 골목에서 방향을 바꾸다 보니 두 시간 가까이 머물렀다. 걷는 속도와 쉬는 횟수에 따라 달라지는 시간이다. 일정표에 한 시간 단위로 다음 장소를 채워 넣었다면 아쉬웠을 것 같다.
식사나 차 한 잔은 언덕을 내려온 뒤 시내 쪽에서 해결하기 편했다. 주택가 안에서 가게를 찾느라 길을 여러 번 오가기보다, 산책을 마치고 서호동과 강구안 방향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자연스럽다. 날이 더운 계절에는 오르기 전에 물을 챙기는 것도 좋다. 나는 전망대에서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가볍게 출발했다가 계단 중간에서 한 번 더 쉬었다.
국내여행지추천 목록에 통영을 넣는다면 서피랑은 유명한 풍경 사이에 잠깐 끼워 넣을 곳보다는, 천천히 걷는 시간을 따로 줄 만한 동네다. 사람이 적은 순간은 여행자가 마음대로 예약할 수 없지만, 걸음을 늦추는 일은 내가 정할 수 있다. 서피랑에서 돌아온 뒤에도 오래 남은 건 전망대 사진보다 골목을 내려오던 그 느린 속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