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여행에서 타임스스퀘어 대신 동네 골목을 걸어봤더니

얼마 전 뉴욕에 머무는 동안, 이상하게도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곳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브루클린 브리지도 아니었다. 아침 8시쯤 문을 여는 동네 빵집 앞, 빨래방 유리창에 비친 사람들, 강가 벤치에서 말없이 커피를 마시던 시간이 더 또렷하게 남았다. 뉴욕여행이라고 하면 보통 화려한 스카이라인부터 떠올리지만, 사실 이 도시는 조금만 옆길로 빠지면 꽤 조용하고 생활감 있는 얼굴을 보여준다.
이번에는 일부러 유명한 장소를 하루에 여러 개 찍는 방식에서 벗어났다. 지하철을 오래 타고, 동네 슈퍼에 들어가고, 관광객보다 주민이 많은 길을 걸었다. 하루 평균 1만 5천 보 정도 걸었는데, 피곤하다기보다 도시의 속도를 천천히 배운 느낌에 가까웠다.
레드훅에서 만난 낮은 뉴욕
브루클린 남서쪽의 레드훅은 맨해튼 중심부와는 공기가 꽤 다르다. 지하철역에서 바로 닿지 않아서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하는데, 그 불편함 덕분인지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다. 평일 오전 10시쯤 도착했을 때 큰길에도 사람이 많지 않았고, 창고를 고친 카페와 작은 공방들이 드문드문 열려 있었다.
레드훅에서 좋았던 건 시야가 낮다는 점이었다. 높은 빌딩이 빽빽하게 서 있는 뉴욕이 아니라, 낡은 벽돌 건물과 항구 근처의 넓은 하늘이 먼저 보인다. Louis Valentino Jr. Park 쪽으로 걸어가면 자유의 여신상이 멀리 보이는데, 배를 타고 가까이 가는 것보다 오히려 덜 극적이라 좋았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려고 몰려드는 곳이 아니라, 동네 사람이 개를 산책시키고 누군가는 점심 도시락을 먹는 곳이라서 풍경이 편했다.
- 방문 시간대: 평일 오전 10시부터 낮 1시 사이가 조용했다.
- 이동: 지하철만으로는 애매해서 버스나 택시를 함께 쓰는 편이 낫다.
- 분위기: 관광지보다는 항구 동네 산책에 가깝다.
루스벨트 아일랜드는 뉴욕의 중간 쉼표 같았다
맨해튼과 퀸스 사이에 길게 놓인 루스벨트 아일랜드는 뉴욕여행 중 잠깐 숨을 고르기 좋은 곳이었다. 트램을 타고 들어가는 길이 유명하긴 하지만, 막상 섬 안으로 들어가면 생각보다 훨씬 조용하다. 내가 갔던 날은 토요일 오후였는데도 중심 산책로를 조금 벗어나니 사람 간격이 넓어졌다.
섬 남쪽의 Four Freedoms Park까지 천천히 걸었다. 강 건너 맨해튼의 빌딩들이 보이지만, 이쪽은 이상할 만큼 차분하다. 뉴욕을 바라보는데 뉴욕 한복판에 있지 않은 기분. 솔직히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보다 이 거리감이 더 마음에 들었다. 벤치에 앉아 20분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 시간이 여행 일정 중 가장 여유로웠다.
근데 이곳은 너무 많은 걸 기대하고 가면 심심할 수 있다. 쇼핑할 곳이나 화려한 식당이 많은 동네는 아니다. 대신 걷기 좋고, 물가를 따라 바람이 잘 들어오고, 복잡한 맨해튼에서 잠깐 빠져나온 느낌이 분명하다.
서니사이드에서 아침을 먹으며 본 동네의 속도
퀸스의 서니사이드는 관광 안내서에서 크게 다루는 동네는 아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갔다. 오전 9시쯤 7번 지하철을 타고 도착했는데, 역 주변은 출근하는 사람과 장을 보러 나온 주민들로 적당히 분주했다. 복잡하긴 해도 Times Square의 밀도와는 전혀 다르다. 사람들 사이에 목적지가 있고, 그 목적지가 여행자가 아니라 동네의 하루라는 점이 좋았다.
작은 다이너에 들어가 계란과 토스트, 커피를 주문했다. 가격은 맨해튼 중심부보다 확실히 부담이 덜했고, 옆자리에서는 누군가 스페인어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뉴욕은 영어만 들리는 도시가 아니라는 걸 이런 동네에서 더 선명하게 느낀다. 몇 블록만 걸어도 아이리시 펍, 라틴 식료품점, 오래된 세탁소가 이어지고, 간판의 언어도 조금씩 달라진다.
서니사이드에서 좋았던 작은 장면들
- 지하철 고가 아래로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던 오전 거리
- 현금 계산을 더 익숙하게 받던 오래된 델리
- 맨해튼까지 20분 안팎인데도 동네 분위기가 뚜렷했던 점
그린우드 묘지에서 걷는 조용한 오후
브루클린의 Green-Wood Cemetery는 이름만 들으면 여행지로 넣기 망설여질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걸어보면 공원에 가까운 느낌이 강하다. 면적이 약 478에이커라 꽤 넓고, 언덕과 나무, 오래된 조각들이 이어진다. 내가 갔던 평일 오후에는 입구 근처를 지나자마자 소음이 확 줄었다.
이곳의 매력은 조용함을 일부러 꾸미지 않았다는 데 있다. 길은 넓고, 나무 그늘은 깊고, 멀리 브루클린의 건물들이 낮게 보인다. 관광지처럼 설명판을 따라 바쁘게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그냥 천천히 걸으면서 낯선 도시의 오래된 시간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다만 분위기상 큰 소리로 떠들거나 사진만 찍고 빠르게 지나가기에는 맞지 않는 곳이다. 공간이 가진 성격을 존중하면서 걷는 편이 좋다. 뉴욕에서 이렇게 조용한 오후를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의외였고,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뉴욕은 유명한 곳 사이의 빈칸이 더 좋을 때가 있다
뉴욕여행을 처음 가는 사람이라면 센트럴파크, 미술관, 전망대 같은 장소도 분명 의미가 있다. 나도 그런 곳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다만 유명한 장소만 따라가다 보면 뉴욕이 너무 큰 화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반대로 레드훅의 강가, 루스벨트 아일랜드의 벤치, 서니사이드의 아침 식당, 그린우드의 나무길은 도시를 손에 잡히는 크기로 줄여준다.
사람 적은 뉴욕을 찾고 싶다면 일정을 조금 비워두는 게 먼저다. 하루에 명소를 5개씩 넣기보다, 한 동네에서 3시간 정도 머무는 식이 더 잘 맞았다. 지하철역에서 목적지까지 바로 가지 않고 두세 블록 돌아가는 것도 좋다. 뉴욕은 큰길보다 옆길에서 생활감이 더 자주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여행이 꼭 특별한 장면으로만 채워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낯선 도시의 빵집에서 커피를 들고 나오거나, 버스 창밖으로 모르는 동네를 지나치는 시간도 충분히 여행답다. 뉴욕은 크고 빠른 도시지만, 천천히 걸으면 의외로 조용한 표정을 꽤 오래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