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국내 여행지에서 골목만 걸어봤더니

지난겨울 목포의 작은 골목을 걷다가 바다가 보이는 계단 앞에서 한참 멈춘 적이 있다. 유명한 전망대에 도착한 것도 아닌데, 낮은 지붕들 사이로 보이는 물빛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12월 국내 여행지를 고를 때 나는 그런 장면을 먼저 떠올린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보다 동네의 하루를 잠깐 따라 걷는 일이 좋다.
목포 서산동에서는 바다가 조금씩 보인다
서산동 시화골목은 목포역에서 원도심을 지나 찾아갈 수 있다. 처음 간다면 ‘연희네슈퍼’를 길잡이로 삼으면 편하다. 그 앞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서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좋아한 풍경은 그 뒤부터였다. 골목이 세 갈래로 나뉘고, 어느 길을 택하든 보리마당 쪽으로 오르는 동안 바다가 집들 사이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시와 그림을 읽으며 천천히 올라갔다. 화분이 놓인 담장과 생활 흔적이 남은 계단 때문에 걸음이 자연히 느려졌다. 보리마당에 닿아 뒤돌아보면 방금 지나온 지붕들과 항구 쪽 풍경이 함께 들어온다. 목포를 바다 여행지로만 생각했다면 조금 다른 얼굴을 만나는 셈이다. 한국관광공사 여행 안내에서도 이곳을 주민들이 생활하는 마을로 소개한다. 실제로 걷다 보면 그 말이 금방 와닿는다.
12월에는 바닷바람이 골목 안까지 들어오니 목도리 하나가 꽤 든든하다. 오르막과 계단도 있어 바닥이 미끄러운 날에는 보리마당까지 무리해서 올라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 나는 밝은 낮에 걷고 해가 기울기 전에 내려오는 동선이 편했다. 창문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대거나 좁은 길에서 오래 서 있기보다, 주민이 지나가면 먼저 길을 비켜주는 게 이 동네와 잘 어울린다.
강릉 명주동에서는 바다 대신 오래된 거리를 걸었다
강릉에 가면 으레 해변부터 찾았는데, 한 번은 강릉대도호부 관아 주변에서 명주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관아와 오래된 주택, 작은 가게가 가까이 붙어 있어 별다른 계획 없이도 걸을 만했다. 명주동이라는 이름이 강릉의 옛 지명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알고 나니 골목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오래된 건물을 고쳐 쓴 공간 옆에 평범한 집이 이어지는 거리였다.
내가 걷기 좋았던 순서는 관아 주변에서 시작해 명주동 안쪽 길을 천천히 지나고, 다시 큰길로 나오는 것이었다. 골목 하나를 끝까지 보는 데 집착할 필요가 없다. 눈에 들어오는 담장 앞에서 잠깐 멈추고, 추우면 문을 연 가게에서 몸을 녹이면 된다. 강릉역에 도착했다면 시내 교통편으로 원도심 쪽까지 이동한 뒤 관아를 기준점으로 잡기 쉽다. 버스 노선이나 가게 영업일은 바뀔 수 있으니 출발하는 날 확인하는 편이 마음 편하다.
솔직히 명주동을 언제나 조용한 곳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주말 오후에는 인기 있는 가게 앞이 붐빌 때도 있다. 그래도 큰길에서 한두 블록 벗어나면 생활하는 동네의 속도가 느껴진다. 겨울에는 해가 빨리 지고 바람도 차가워,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짧게 두 번 걷는 방식이 잘 맞았다. 바다를 보러 온 여행에서도 골목에 한두 시간을 남겨두게 된 이유다.
통영 봉숫골은 목적지보다 걷는 시간이 좋았다
통영에서는 동피랑 대신 봉평동 봉숫골 쪽을 걸었다. 전혁림미술관을 기준으로 길을 잡으면 처음 가는 사람도 방향을 잡기 수월하다. 미술관 주변에는 작은 가게와 주택이 섞여 있고, 조금만 걸어도 관광지를 빠르게 도는 때와는 다른 리듬이 생긴다. 봄의 벚꽃길로 알려진 동네지만, 잎이 진 12월에는 골목의 건물과 평소 거리가 더 또렷하게 보였다.
여기서는 어느 지점을 꼭 봐야 한다는 목록을 만들지 않았다. 미술관 쪽으로 갔다가 마음에 드는 길로 돌아 내려오고, 문 연 가게가 있으면 쉬었다. 통영종합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다면 봉평동이나 전혁림미술관을 도착 지점으로 잡고 당일 이동편을 확인하면 된다. 미술관 관람까지 생각한다면 운영 여부도 먼저 살펴야 한다. 골목 산책 자체는 짧게 마쳐도 괜찮아서, 겨울 해가 낮아질 무렵에는 무리 없이 돌아설 수 있었다.
세 동네를 다니며 12월 여행에서는 일정을 넉넉하게 잡는 편이 좋다고 느꼈다. 추운 날 골목을 오래 걷겠다는 계획보다, 낮에 한 동네를 천천히 보고 따뜻한 실내에서 쉬는 시간이 더 오래 남는다. 사진 한 장 없이 지나친 모퉁이가 나중에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 날에는 여행을 다녀왔다는 기분보다 잠깐 다른 동네에서 살다 온 듯한 기분이 든다.
